어째서 찻잎을 발효시키게 됐는지 알려면 흑차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흑차가 차의 종류 중 하나로 완전히 정착하게 된 것은 명나라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미생물을 이용한 후발효차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북송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사천성에서 토번으로 불린 티베트와 위구르 등 국경 북서쪽의 유목민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녹차를 원료로 오차(烏茶)라는 검은빛 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차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송은 문화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여진족의 금나라와 거란족의 요나라 등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농업 국가였던 송은 전쟁에 필요한 말을 기르기 위한 목초지가 늘 부족했다. 그렇기에 인근 유목 민족들에게 찻잎을 제공하는 대신 빼어난 군마를 받아 오는 차마(茶馬)무역에 집중해야 했다. 차와 말을 교환하는 차마호시(茶馬互市) 자체는 당나라 때 이미 시작됐다. 상인들은 차를 바리바리 실어 중국 사천성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역로 중 하나인 차마고도에 올랐다. 고기와 유제품이 주식인 유목민들에게 차는 영양 불균형과 소화불량을 해결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생활필수품이었다. 이렇게 맞물린 서로의 이해관계는 몽골족의 나라였던 원대에 잠시 중단됐다가 명을 지나 청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운반의 편의를 위해 단단한 덩어리 형태로 뭉친 찻잎들은 높고 험준한 차마고도를 넘으며 열과 습기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런 와중에 찻잎들은 해차의 싱그러운 초록빛을 잃고 점차 누런 갈색으로, 때로는 검게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만들어지던 차는 증기를 쐬어 살청한 녹차로, 이러한 찻잎의 변화는 산화보다 미생물이 일으킨 발효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풋풋한 녹차보다는 이렇게 검게 변한 차 쪽이 고기 위주의 기름진 음식에는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유목민들은 중국에서 보내온 녹차를 일부러 숙성시켜 때로는 우유나 버터를 곁들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밀크티를 마신 사람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중원의 한족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차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식문화의 중심에 자리 잡은 필수품이었기에 다 자라 쇤 잎이나 가지가 섞여 들어가 저렴한 차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찻잎을 발효시키는 데에는 굳이 어리고 연한 잎을 쓸 필요가 없었기에 흑차는 중국의 변방에서 더욱 큰 인기를 끌게 된다. 후에 동남아 일대로 화교들이 이주하며 이 지역에서도 흑차를 널리 마시게 됐다. 19세기에 이르면 차마무역의 중심이었던 사천성과 운남성뿐 아니라 중국 남부의 호남성과 광서성 그리고 호북성과 안휘성까지 흑차를 만들게 됐다.
흑차가 시작된 곳은 중국의 사천성이지만 흑차 제다 기술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립하고 발전시킨 곳은 호남성의 안화 지역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차로는 대나무 광주리에 눌러 담아 발효시킨 복전(茯磚)과 원기둥 형태로 긴압(단단하게 압축)해 대나무 끈으로 묶어 고정한 천량차(千兩茶)가 유명하다. 흑차를 만들 땐 충분히 자란 잎이 필요하다. 고로 입하 이후에 찻잎을 따며 약퇴 후에는 소나무 장작을 때어 부뚜막에서 차를 말린다. 이 과정에서 차에 은은한 소나무 내음이 스민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만들어진 차는 다시 부숴 재가공 후 긴압한다. 다 만든 차의 겉면은 짙고 윤기 나는 검은빛이지만 찻잎 사이사이 노란 송화 가루라도 뿌려 놓은 듯 금빛 알갱이가 보인다. 이를 마치 금빛 꽃이 피어난 것 같다고 하여 금화(金花)라고 부른다. 사실 이것은 ‘관돌산낭균’이라는 누룩곰팡이의 일종으로, 금화가 핀 차는 맛이 순하고 달콤하며 수색은 일반적인 보이숙차에 비해 밝은 붉은빛을 띤다.
보이숙차가 그렇듯 흑차 또한 해차를 바로 마셔도 상관없지만 세월이 더해갈수록 향과 맛이 차차 온화해진다. 처음에는 덜 마른 빨래같이 쾌쾌하게 느껴지던 특유의 발효취도 차츰 오래된 서가에 내려앉은 시간의 흔적처럼 느슨해지고, 산수유와 같은 햇살에 잘 마른 과실의 달큼한 내음이 더해진다. 차는 맑아지되 단맛은 점차 짙어지는 것. 오래 묵힌 흑차는 보이차 못지않게 고가에 거래되며, 이러한 연유로 흑차는 보이차를 이은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중국에서 각광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발효를 거치며 생기는 여러 성분이 당뇨와 고지혈증 등의 성인병을 예방 및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각계의 관심이 흑차에 집중되고 생산량 및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https://experience.arcgis.com/experience/c756a4761cba42f4a1b9d03fd1762202
2024-10-03
좋아요(0) 답변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