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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차

커피스터디

청차
‘청차(靑茶)’라 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룡차(烏龍茶) 또는 우롱차라고 하면 분명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일본식 주점이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우롱차는 여섯 가지 차 종류 중 청차에 해당한다. 홍차만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차는 아니지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만큼은 녹차 다음으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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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청차의 고향, 무이산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우리가 알고 있는 육대차류(六大茶類)가 정착한 것은 중국 청(淸)대 초기의 일이다. 길게는 반만년에 이른다고 하는 차의 유구한 역사에 비한다면 극히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차의 종류가 지금과 같이 뿌리내리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을 하나만 짚자면 아무래도 찻잎을 산화시키는 기술의 발견일 것이다. 찻잎을 산화시켜 만드는 차로는 홍차를 비롯한 청차, 백차 세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중국 푸젠성(복건성)에서 시작된 차다. 그중에서도 찻잎을 시들리고 비벼 초록빛의 생엽을 점차 붉게, 그리고 갈색으로 변하게끔 하는 산화 기술은 푸젠성 가장 북쪽에 위치한 무이산에서 만들어졌다.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석이 기이하면서도 장쾌한 풍경을 자아내는 무이산은 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무이산 아홉 골짜기의 아름다움을 담아 구곡도가(九曲棹歌)를 지었는데, 이는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의 삶을 계곡에서 노 저어 나아가는 것에 비유한 명작이다. 구곡도가는 훗날 그를 흠모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지금도 무이구곡의 풍경을 묘사한 산수화와 이에 바치는 헌시들이 두루 남아있다. 유교에서 비롯된 성리학이 동아시아 전체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무이산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그 이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을 초대한 자리에서 선물한 차도 무이산을 대표하는 청차인 대홍포(大紅袍)였다.

무이산은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는 날이 잦으며 일교차가 크다는 점에서 차나무가 자라기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황제에게 진상하는 차를만들던 어차원(御茶園)이 일찍이 자리 잡기도 한 명산지다. 하지만 바위산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차나무를 넓고 빽빽하게 심기 어려워 대량 생산이 불가하다. 이곳의 차밭들은 대부분 계단형의 소규모 다원이며 그마저도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어 차를 만들려면 이곳저곳의 찻잎을 바구니에 담아 모아야 하고, 산 아래에 있는 작업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바구니 속에서 부대낀 찻잎들은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었으며, 이렇게 흠지고 시들은 찻잎에서 도리어 좋은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이 지역 차농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보히 혹은 보헤아라 불렸던 차
 

무이산의 산화된 찻잎들이 새로운 차의 종류로서 무대 한가운데 오르게 된 것은 17세기 명(明)대 말엽에 이르러서였다. 대항해시대를 맞은 유럽의 배들은 마침내 중국의 항구에 다다랐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 구석구석 찻잎이 실렸다. 서구 사회는 차라는 새로운 미각적 충격에서 쉬이 헤어나오지 못했고 더 많은 사람이 차를 찾게 됐으나 이때의 녹차엔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녹차는 열과 습기에 매우 취약하며 향과 맛이 유지되는 기한이 몹시 짧다. 현대의 포장 및 유통 기술로도 녹차의 상미기간은 기껏해야 한두 해를 넘기기 힘들 정도다. 하물며 수에즈 운하조차 개통되지 않아 적도를 넘어 희망봉을 돌아 항해해야만 했던 17, 18세기에는 차가 금세 변질되곤 했을 것이다. 열악한 포장 상태는 말할 것도 없다. 배에 실었을 때와는 빛깔도 향기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된 녹차에 의구심을 품고 중국의 차상들에게 항의한 유럽 상인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기존의 녹차로는 새로운 시장을 사로잡기 어렵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차가 바로 보히Bohea였다.

보헤아라고도 불리는 이 차는 유럽 시장에 처음으로 등장한 산화된 차다. 보히가 홍차였는지 청차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두 차 모두 같은 차로부터 시작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녹차에 비해 또렷한 맛과 향기를 품은 이 차에 유럽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유통 기간이 길고 쉽게 변질되지 않으면서도 풍미가 깊고 짙은 차는 서구의 식문화에 금세 녹아들었다. 1935년 윌리엄 유커스William Ukers가 쓴 책인 『차의 모든 것』에 따르면, 1750년 영국 에든버러의 한 신문 광고에 ‘녹차는 1파운드에 16실링, 보히는 1파운드에 30실링’이라 적혀있었다고 한다. 녹차 가격의 거의 두 배에 팔렸을 정도니 현지에서의 보히의 인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이암차부터 대만 우롱까지
 

중국 푸젠성 무이산에서 만들어진 보히는 이후 유럽이라는 새로운 차 시장에 대응하며 점차 짙은 붉은색의 수색을 띤 홍차로 자리 잡아갔다. 한편 중국 사람들은 산화라는 새로운 제다 패러다임을 몇천 년간 이어온 차 문화 속에 포용하며 그들의 취향에 맞게 정교히 발전시켜 그전까지 없던 다양한 차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차다. 이처럼 홍차와 청차는 같은 차로부터 시작됐으나 각자 다른 문화권에서 소비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차라고 할 수 있다.

홍차가 찻잎을 세게 비벼 끝까지 산화시키는 것과 다르게 청차의 핵심은 찻잎에 적당히 상처를 내고 원하는 만큼 산화되면 열을 가해 이를 멈추는 것이다. 얼마큼 산화시키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의 수색과 향기 그리고 맛을 지닌 청차가 나올 수 있다. 찻잎을 시들리는 것은 홍차와 동일하지만 청차는 찻잎을 비비는 대신 대나무 채반 위로 조금씩 덜어 살살 흔들어줬다 멈추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를 주청(做靑)이라고 한다. 처음 무이산에서 만들었던 청차는 마지막 건조 과정에서 차를 숯불 위에서 구워 홍배(烘焙)1)했는데, 이러한 제다 방식은 이내 푸젠성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됐다. 이렇게 만든 차는 찻잎의 색이 검고 승천하는 용이 몸을 뒤트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해서 오룡차, 즉 우롱차로 불렸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안계철관음(安溪鐵観音)으로, 이는 향후 대만으로 건너가 새로운 차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이 중 어떤 대만의 우롱차들은 동글동글하게 말려있어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찻잎들이 또르르 구르며 서서히 펴진다. 살청을 마친 찻잎을 천으로 감싸 강하게 압착하는 것을 반복하는 포유(包揉)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엷게 산화된 비췻빛 청차들의 경우 맑은 청향을 살리기 위해 건조 후 숯으로 홍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어린잎이 많이 포함될수록 좋은 차라는 인식이 있지만, 무이암차(武夷巖茶)를 비롯한 청차류를 만드는 찻잎은 충분히 자란 잎으로 만든다. 그래야 반복되는 주청과 홍배 과정에서 찻잎이 버틸 수 있다. 이로 인

해 청차는 채엽 시기가 녹차류에 비해 다소 늦다. 완성된 이후에도 찻잎을 자루에 담아 서늘한 곳에 보관하며 불기운을 가라앉히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해청차(당해에 새로 난 청차)가 출하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이유다.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철관음, 무이암차, 문산포종(文山包種), 동정오룡(凍頂烏龍), 동방미인(東方美人) 등 청차는 녹차에 가까운 차부터 홍차만큼이나 짙은 바디감을 지닌 것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과연 이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러나 그만큼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청차다. 모든 차에 향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지만 청차에서 향기는 차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차를 처음 즐기는 소비자들에게 향기는 무엇보다 강한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대중성을 갖춰야 하는 카페에서 청차는 소비자들의 이목을 손쉽게 끌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대만의 우롱차들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가격과 품질에 대한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고 국가 차원에서 차를 엄격히 관리하기 때문에 고민을 다소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은 인근 차 생각 국가들에 비해 비싼 인건비로 인해 일찍이 기계를 사용한 대량 생산 체계가 잘 잡혀있어, 인도를 비롯한 티 플랜테이션이 나아가야 할 대안이 되기도 한다. 여유가 된다면 여러 차의 다채로운 겉모습만큼이나 풍부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지금까지 몰랐던 차의 새로운 매력에 푹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 건조 과정을 마친 차를 다시 약한 불에서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건조하면서 차의 향기를 북돋아주는 과정. (출처: 차생활문화대전)


Writer / Photo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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